깊고 짙은 믿음의 색깔로 바꿔 입으십시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슈가로프 작성일15-05-03 16:23 조회1,71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왜 하버드생은 바보가 되었나” 라는 부제목을 가진 책, [공부의 배신] 의 저자인 윌리엄 데레저위츠는, 공부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데 정작 왜 공부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보다는 남들이 선망하는 목표를 따라하는데 더 익숙한 ‘수퍼 학생’ 들의 실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지적을 통해 열정의 상실과 두려움 때문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하게 만들고 그래서 실패할 일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아주 잘하는 것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공허하고 목적없는 헛똑똑이들과 그들을 양산하는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실랄하게 고발했습니다.
또한 학제의 최정상인 대학이 인문학(humanities)의 전당이 아니라 ‘오락의 전당’ (amenities)으로 전락해 버렸고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캠퍼스(campus)가 아니라 이윤 창출만을 추구하는 컴퍼니(company)로 둔갑해 버렸다고 탄식했습니다.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이런 지적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미국보다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 현실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다 언급할 수도 없을뿐더러 부끄러운 치부를 다시 드러낼 필요가 없을만큼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현교육제도를 고발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이 칼럼의 주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글을 대하면서 크게 공감이 됨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아리게 아파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수 십개의 화물칸을 끌고 쉴새없이 먼길을 가는 기차의 능력이 경이로울만큼 대단하지만, 정작 기차 자신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듯이, 오늘 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존의 신앙 틀에는 잘 맞추고, 또 뭔가를 이루어내는 능력은 있지만, ‘신앙의 열정’ 과 ‘신앙의 도전성’ 은 없고 ‘신앙의 창의성’ 조차 상실한 채 종교행위에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풍토가 널리 퍼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헌신하자니 부담되고 포기하자니 불안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교회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는 우주적 미아가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떠한지, 과연 나는 어떠한지 언제나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굶주림에 포효하며 입 벌리고 먹잇감을 찾는 사자처럼 믿는자들을 집어삼키려는 마귀의 세력들이 세련되게 포장된 짝퉁 신앙고백과 헌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계절인 4월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쯤 되면 2015년이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품었던 신앙의 열기가 식고, 열정이 느슨해지기 쉽습니다. 믿음의 옷매무새를 다시 여미고 허리띠를 졸라메면서 ‘수퍼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타성을 떨쳐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짙어가는 신록처럼 깊고 짙은 믿음의 색깔로 옷입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는 이 지적을 통해 열정의 상실과 두려움 때문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일은 아예 회피하게 만들고 그래서 실패할 일도 없고, 그러면서도 자신이 잘 알고 있고 아주 잘하는 것이라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공허하고 목적없는 헛똑똑이들과 그들을 양산하는 미국의 교육 시스템을 실랄하게 고발했습니다.
또한 학제의 최정상인 대학이 인문학(humanities)의 전당이 아니라 ‘오락의 전당’ (amenities)으로 전락해 버렸고 전인적인 교육이 이루어지는 캠퍼스(campus)가 아니라 이윤 창출만을 추구하는 컴퍼니(company)로 둔갑해 버렸다고 탄식했습니다.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이런 지적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미국보다 훨씬 더 심하면 심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은 대한민국의 교육제도와 현실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 지면에서 다 언급할 수도 없을뿐더러 부끄러운 치부를 다시 드러낼 필요가 없을만큼 우리 모두가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의 현교육제도를 고발하거나 비난하려는 게 이 칼럼의 주목적이 아닙니다.
다만 윌리엄 데레저위츠의 글을 대하면서 크게 공감이 됨과 동시에, 가슴 한편이 아리게 아파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우리 믿는 사람들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수 십개의 화물칸을 끌고 쉴새없이 먼길을 가는 기차의 능력이 경이로울만큼 대단하지만, 정작 기차 자신은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하듯이, 오늘 믿는 사람들이 자신을 기존의 신앙 틀에는 잘 맞추고, 또 뭔가를 이루어내는 능력은 있지만, ‘신앙의 열정’ 과 ‘신앙의 도전성’ 은 없고 ‘신앙의 창의성’ 조차 상실한 채 종교행위에만 전전긍긍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풍토가 널리 퍼져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헌신하자니 부담되고 포기하자니 불안해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모습,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채 교회와 세상 가운데서 방황하는 우주적 미아가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떠한지, 과연 나는 어떠한지 언제나 경각심을 가지고 자신을 성찰하며 성령의 도우심을 갈망하여야 합니다. 굶주림에 포효하며 입 벌리고 먹잇감을 찾는 사자처럼 믿는자들을 집어삼키려는 마귀의 세력들이 세련되게 포장된 짝퉁 신앙고백과 헌신의 기준으로 우리를 미혹하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계절인 4월이 지나고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쯤 되면 2015년이 시작하면서 나름대로 품었던 신앙의 열기가 식고, 열정이 느슨해지기 쉽습니다. 믿음의 옷매무새를 다시 여미고 허리띠를 졸라메면서 ‘수퍼 신앙인’들이 빠지기 쉬운 타성을 떨쳐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짙어가는 신록처럼 깊고 짙은 믿음의 색깔로 옷입는 계절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