딜레마인가 패러독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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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3 20:26 조회3,08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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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딜레마에 빠져 고민하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함부로 막 쓸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한 철학자의 그 유명한 명제 "사느냐 죽느냐?" 가 여기에 속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이것이 문제로다" 고 탄식했겠지요. 그런데 딜레마라는 말이 가진 원 뜻은 두 개의 가정 (two assumptions)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그럴 듯 해 보이는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대안을 앞에 두고 어느 쪽을 붙잡을 것인가에 대해 갈등하는 것, 이런 상황을 가리켜 딜레마에 빠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 패러독스는 역설 이라는 우리말이 보여주듯이 상식이나 그 시대 사조에 어긋난 말이나 생각이지만 그것이 진리일 수 있는 짙은 가능성으로 인해 그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반대되는 의견 이라는 본 뜻이 말하듯, 패러독스는 언제나 충돌과 대립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긴장감이 고조되고 급기야는 논쟁도 벌어집니다. 지동설 주장을 신성모독의 중죄로 다스렸던 오류를 범하던 교회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던 갈릴레오의 절규는 이 패러독스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폴 틸리히 라고 하는 신학자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paradox is a new reality and not a logical riddle," "패러독스는 논리적인 난제가 아니고 새로운 실체이다." 그러니까 '고리타분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부딪혀와 우리를 긴장하게 하며 번민하게 하는 실존적인 문제'가 바로 패러독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딜레마는 여러 개의 선택의 여지 속에서 개인의 편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패러독스는 개인이 선호하는 것엔 관계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다수의 의견에도 상관없이 진리라고 믿는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이런 차이점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은 그 성격상 딜레마 쪽이 아니라 패러독스 쪽에 속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부르짖었던 내용이든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산에서 하신 설교말씀이든지, 혹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든지 간에, 성경의 말씀은 듣는 우리들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모순처럼 들린다할지라도 변함없는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패러독스로 다가오는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문만 좁아 들어가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막상 들어가 보면 걸어가야 할 길조차도 협착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포장된 하이웨이가 아니라 비포장도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릴 적의 많은 추억에 떠오르는 신작로랄지 비온 후 또는 겨우내 얼어붙었다 녹아버려 질펀하게 된 봄 길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은 딜레마를 안고 갈등하는 사람이 아니라 패러독스를 품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때론 고독해 보여도 주저함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가다가 힘이 들어도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 것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는 패러독스에 목숨을 건 갈릴레오를 후대의 사람들은 존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목숨을 거는 것은 그 보다 더 훨씬 보람있는 일이고 자랑스런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그 도는 지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패러독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05/04/2003]
거기에 비해 패러독스는 역설 이라는 우리말이 보여주듯이 상식이나 그 시대 사조에 어긋난 말이나 생각이지만 그것이 진리일 수 있는 짙은 가능성으로 인해 그것을 결코 가볍게 여겨서는 안될 경우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반대되는 의견 이라는 본 뜻이 말하듯, 패러독스는 언제나 충돌과 대립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긴장감이 고조되고 급기야는 논쟁도 벌어집니다. 지동설 주장을 신성모독의 중죄로 다스렸던 오류를 범하던 교회의 서슬 퍼런 권력 앞에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 던 갈릴레오의 절규는 이 패러독스의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폴 틸리히 라고 하는 신학자가 한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The paradox is a new reality and not a logical riddle," "패러독스는 논리적인 난제가 아니고 새로운 실체이다." 그러니까 '고리타분한 말장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롭게 부딪혀와 우리를 긴장하게 하며 번민하게 하는 실존적인 문제'가 바로 패러독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딜레마는 여러 개의 선택의 여지 속에서 개인의 편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패러독스는 개인이 선호하는 것엔 관계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다수의 의견에도 상관없이 진리라고 믿는 것 때문에 이루어지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다릅니다.
이런 차이점에 의하면 성서의 가르침은 그 성격상 딜레마 쪽이 아니라 패러독스 쪽에 속합니다.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이 부르짖었던 내용이든지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그 중에서도 특별히 산에서 하신 설교말씀이든지, 혹은 세상의 종말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가르치심이든지 간에, 성경의 말씀은 듣는 우리들로 하여금 딜레마에 빠지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모순처럼 들린다할지라도 변함없는 진리가 내포되어 있는 패러독스로 다가오는 말씀이어야만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도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셨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는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문만 좁아 들어가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막상 들어가 보면 걸어가야 할 길조차도 협착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포장된 하이웨이가 아니라 비포장도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릴 적의 많은 추억에 떠오르는 신작로랄지 비온 후 또는 겨우내 얼어붙었다 녹아버려 질펀하게 된 봄 길과도 같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찾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은 딜레마를 안고 갈등하는 사람이 아니라 패러독스를 품고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때론 고독해 보여도 주저함 없이 길을 떠나는 사람입니다. 가다가 힘이 들어도 딜레마에 빠지지 않는 것은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진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는 패러독스에 목숨을 건 갈릴레오를 후대의 사람들은 존경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목숨을 거는 것은 그 보다 더 훨씬 보람있는 일이고 자랑스런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그 도는 지구를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패러독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05/0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