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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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한인교회 작성일23-03-31 14:20 조회3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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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길가의 사람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막 11:9-10) 하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했던 것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던 이 장면을 가리켜 “승리의 입성”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이 승리는 그 때 그 사람들이 생각하고 기대했던 승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너진 다윗 왕조를 일으켜 세울 전쟁 영웅을 기대하며 정치적 메시아가 가져다 줄 승리를 꿈꾸며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시려 승리의 입성을 하시던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십자가 뿐이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찔리고 상하심을 받으려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곤욕과 심문”을 당하시려고 들어가셨습니다 (사 53:1-9).
‘비터스윗’ (bittersweet)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쓴맛과 단맛이 동시에 있는 것, 그러니까 고통스럽지만 기쁘고, 절망적이지만 소망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순된 것 같으나 지극히 논리적이고 그래서 역설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얼른 보기에는 모순되어 보이고 또는 불합리한 듯하나, 면밀히 고찰해 보면 진실임을 깨닫게 되는 진술 방법”을 역설 혹은 패러독스라고 하지요.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것, 십자가에서 승리를 선포하신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성도의 삶에도 비터스윗한 역설의 순간들이 늘상 찾아옵니다. 사도 바울의 간증이 그 점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후 6:7-10) 고 했거든요.
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라고 고백하기도 했는데요, 그 원인과 목적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제시했습니다 –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0).
우리 삶에 찾아오는 ‘비터’ 즉, 고통의 순간들이 ‘스윗’한 복이 될 수 있는 것은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보배이신 주의 영이 거하시기 때문이며, 우리가 오늘도 숨 쉬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달아 알고 우리를 통해 예수의 생명이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드러나게 하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주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자비와 은혜의 손길이 ‘비터스윗’의 기적같은 역설을 성도들의 삶의 현장에서 행하십니다. 제 아내를 통해 보여주신 주님의 자비와 은혜를 인해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주 하나님께 올려드립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롬8:32)는 말씀대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롬 8:28)이루시는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저희 가정에 임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은혜 베푸심이 여러분 모두에게도 함께 하시는 줄 믿고 또한 축복합니다. 그동안 기도해주시고 격려해 주신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영광을 “호산나”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우리 왕 예수님께 올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