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의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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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 작성일13-05-19 14:18 조회1,9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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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페이스북에 올라운 감동적인 영상을 보며 느낀 것을 토대로 저의 가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주제는 위 제목이 보여주듯이 ‘포기함’의 용기였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대로 하자면 ‘내려놓음의 용기’ ‘자아부정의 용기’ 또는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영상은 뽀로로라고 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만화를 만들기까지 작가가 포기해야 했던 점들에 대해 진솔하게 “간증”하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특별함으로부터의 포기를 위한 용기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이야기, 특별하지 않은 소재거리, 그렇게 아이들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게 다가가는 것들을 붙들기 위해 특별하고 싶은 욕망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둘째, 어른스러움의 포기를 말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진 욕심이 일절 반영되지 않기 위해, 어른의 기준을 포기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습니다.
셋째, 더하고자 하는 욕심의 포기를 말했습니다. 그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중요함을 말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넷째, 위의 포기하는 행위를 하면서 보니까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노라는 점이었습니다. 자기의 냉철한 이성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지만, 제 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 속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고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 말씀을 순종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조건이 선행될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붙들고 있고, 그래서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은혜로 맡겨주신 것이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청지기 정신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찬은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란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나는 매니저일뿐이고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진솔하게 할 수 있어야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교회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싫든 좋든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다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비지니스나 재능이나 여러분의 생명까지도 사실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되신 예수님의 맘에 맞도록 경영하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참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험하고 멉니다. 더 앉아 있고 싶어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우리도 일어나 가야 합니다. 더 가고 싶어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멈추면 우리도 멈춰야 합니다. 바다를 건너자고 하시면 바다를 건너가야 하고, 광야 길로 가자 하시면 광야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게 청지기인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그는 특별함으로부터의 포기를 위한 용기를 냈다고 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이야기, 특별하지 않은 소재거리, 그렇게 아이들에게 전혀 특별하지 않게 다가가는 것들을 붙들기 위해 특별하고 싶은 욕망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둘째, 어른스러움의 포기를 말했습니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가진 욕심이 일절 반영되지 않기 위해, 어른의 기준을 포기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고 했습니다.
셋째, 더하고자 하는 욕심의 포기를 말했습니다. 그는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가 중요함을 말하려고 했다고 했습니다.
넷째, 위의 포기하는 행위를 하면서 보니까 깨달은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제 정신으로는 할 수 없었노라는 점이었습니다. 자기의 냉철한 이성이나 논리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지만, 제 정신이 아닌 다른 정신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16:24)는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말씀 속에는 참 많은 의미가 담겨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학대하고 고행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 이상,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이 땅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이 말씀을 순종하며 실천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한가지 조건이 선행될 때일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붙들고 있고, 그래서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고, 주님이 은혜로 맡겨주신 것이라고 하는, 소위 말하는 청지기 정신 위에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모든 크리스찬은 청지기입니다. 그리고 청지기란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결국 나는 매니저일뿐이고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이 고백을 진솔하게 할 수 있어야 나를 부인할 수 있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교회는 저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그래서 싫든 좋든 주인이신 예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간판을 달았다고 해서 다 주님의 교회가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비지니스나 재능이나 여러분의 생명까지도 사실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인되신 예수님의 맘에 맞도록 경영하고 사는 것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는 참 의미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길은 험하고 멉니다. 더 앉아 있고 싶어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이면 우리도 일어나 가야 합니다. 더 가고 싶어도 구름기둥 불기둥이 멈추면 우리도 멈춰야 합니다. 바다를 건너자고 하시면 바다를 건너가야 하고, 광야 길로 가자 하시면 광야 길로 가야 합니다. 그게 청지기인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착하고 충성된 청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