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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과 기독교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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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한인교회 작성일24-04-05 20:14 조회2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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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이란 말 그대로 ‘거스리는 설’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거스리는 말인 것

같지만 사실은 거스림을 넘어 진실을 강조하는 의미가 담긴 말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역설과 대조되는‘모순’은 그냥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 수준에 지나지 않는 말입니다.

어떤 창검이 뚫을 수 없는 방패라고 선전하는 사람이 동시에 어떤 방패도 다 뚫을 수

있는 창검이라고 선전하는 동일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스스로 대단한 모순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고 노래하는

시인이 있다면 이 사람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표현한 역설의 대가라고 할 만합니다.


성경에도 보면 역설이 참 많이 나옵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은 역설의 성경이라고 할 만큼

역설적인 표현 또는 역설법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자신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실

때가 가까웠음을 아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3)고 하신 것이나,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5) 등입니다. 그리고 이런 역설의 진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쉴 새 없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적용되어 드러나는 복음의 역설을 쉽게 풀어본다면, 신앙이

깊어질수록 자신의 존재는 더 작아지는 신비로움을 만들어가게 된다는 것이지요.

살아있는 모든 생물체는 성장하면 그 몸집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성장하고 성숙해질수록 몸집이 작아지고 볼품이 없어집니다.


“애모”라는 유행가가 있습니다. “슬픈 사랑”이라는 의미인데, 마치 이은봉 작가의

산문집 “아프지 않은 사랑이 어디 있으랴”는 제목처럼 역설적인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유행가 가사 중에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는 말처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 앞에만 서면 작아지고 작아져서 자신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그리고 그만큼 오직 예수님의 모습만 커져가는 신비로움을 만들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요즘 알러지로 고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꽃가루를 비롯해서 온갖 가루들이 대지를

덮어 지난 3년동안 최고치를 갱신한 수치 덕분에 눈물 콧물, 재채기와 미열 등으로

몸살이를 합니다. 조지아의 봄은 환상적일만큼 아름다운데, 눈감고 코 막고 숨죽이고

사느라 이 아름다운 생명의 몸짓을 감상하며 엔조이 할 수 없다는 것이 대단한 역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자랄 수 없는 사막이나 광야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이것 또한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인 셈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기도 합니다. 모든 좋은 것에는 반드시 그

대가가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귀하고 소중한 것일수록 지불해야 할 몫은 늘어나는

법이지요. 어느 것 하나 공짜로 혹은 어쩌다 운이 좋아서 호박이 덩굴째 넘어오는

경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황홀한 구원 그리고 가문의 영광인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특권은 결코 저절로 주어진 것이 아닌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의

희생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순종의 대가로 지신 십자가로 우리는 “공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와 빈무덤은 예수님을 믿는 자, 누구에게나 공짜로

허락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즉, 십자가와 빈무덤 이후 부터입니다. 성도의

삶이 “아멘 이후”가 중요하듯이, 종려주일과 부활주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나머지

50번의 주일과 363일간의 일상입니다. 십자가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매일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지극히 역설적으로 바뀌어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