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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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 작성일14-01-26 14:12 조회1,89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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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주신 가장 큰 복 중의 하나가 언어입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창조의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창조의 능력이 있는 언어 (말씀)로 온 우주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능력으로 모든 만물을 다스리는 복을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여 유혹하는 마귀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날조하는 바람에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장 손쉽고도 파괴적인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 치 혀로 우리는 얼마나 남을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바벨탑 사건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 하나도 바로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흩으셨다는 기록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잘못 사용하는 언어의 파괴력입니다. 속담에 “들은 귀는 천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준 말을 한 사람은 금새 잊어버려도 말로 입은 상처는 여간해서는 아물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 만큼 ‘나쁜 말’ ‘못된 말’ ‘더러운 말’ ‘교만한 말’ ‘사악한 말’ ‘음흉한 말’ ‘이간하는 말’ 등등은 마귀에 속한 말이요 성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인 것입니다.
“의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전체에 걸쳐 강조한 바도 바로 바른 언어 사용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3:2)고 함으로써 말의 능력을 상기시켰고,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약3:6), “혀는 능히 길들이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3:8)고 잘못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경고 싸이렌을 울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쉽고도 가장 자주 상처주는 것도 결국 절제되지 않은 말입니다. 삶이 힘들 때 남을 깎아내리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세워보려는 못된 본성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단절된 채 오랫동안 교회 문을 넘나들며 ‘교회생활 기술’만 터득한 사람들 일수록 사용하는 말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곤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증상을 앓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누가 성도, 거룩한 무리입니까? 거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부단히 자신을 쳐서 말씀 앞에 복종시키려고 피흘리는 사람입니다. 말로 남을 피흘리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언컨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좋은 나무는 열매로 압니다. 언어의 열매가 어떻게 열리는지를 보면 예수님께 접붙힘받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생각이 맑지 않으면 말이 깨끗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생각은 무엇을 보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대사의 모습이 마치 돼지 같구려”하자 무학대사는 자신의 눈에는 이성계가 부처같이 보인다며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 속에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은 절대로 마귀의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로 마귀가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피 흘려 구원하신 성도를 실족케 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습니다. 마귀의 말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문을 밟고 드나드는 모든 성도님들마다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말만 하시기를 열망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칼럼의 내용이 한 분에게도 “Offended” 즉, 기분나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잘 하고 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변조하여 유혹하는 마귀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날조하는 바람에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께 반항하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가장 손쉽고도 파괴적인 무기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세 치 혀로 우리는 얼마나 남을 아프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유명한 바벨탑 사건의 중심이 되는 중요한 요소 하나도 바로 언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리들을 흩으셨다는 기록이 시사하는 바가 바로 잘못 사용하는 언어의 파괴력입니다. 속담에 “들은 귀는 천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처를 준 말을 한 사람은 금새 잊어버려도 말로 입은 상처는 여간해서는 아물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그 만큼 ‘나쁜 말’ ‘못된 말’ ‘더러운 말’ ‘교만한 말’ ‘사악한 말’ ‘음흉한 말’ ‘이간하는 말’ 등등은 마귀에 속한 말이요 성도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말인 것입니다.
“의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야고보가 야고보서의 전체에 걸쳐 강조한 바도 바로 바른 언어 사용의 중요성이었습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3:2)고 함으로써 말의 능력을 상기시켰고,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약3:6), “혀는 능히 길들이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약3:8)고 잘못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경고 싸이렌을 울렸습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쉽고도 가장 자주 상처주는 것도 결국 절제되지 않은 말입니다. 삶이 힘들 때 남을 깎아내리는 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체면을 세워보려는 못된 본성이 우리들에게는 남아 있습니다. 특별히 매일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가 단절된 채 오랫동안 교회 문을 넘나들며 ‘교회생활 기술’만 터득한 사람들 일수록 사용하는 말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곤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증상을 앓는 사람이 교회 안에도 얼마든지 존재하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입니다.
누가 성도, 거룩한 무리입니까? 거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려고 부단히 자신을 쳐서 말씀 앞에 복종시키려고 피흘리는 사람입니다. 말로 남을 피흘리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단언컨데 그런 사람은 예수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좋은 나무는 열매로 압니다. 언어의 열매가 어떻게 열리는지를 보면 예수님께 접붙힘받은 좋은 나무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말은 생각에서 나옵니다. 생각이 맑지 않으면 말이 깨끗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생각은 무엇을 보느냐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어느날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에게 “대사의 모습이 마치 돼지 같구려”하자 무학대사는 자신의 눈에는 이성계가 부처같이 보인다며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마음 속에 예수님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은 절대로 마귀의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 생각으로 충만한 사람은 절대로 마귀가 좋아하는 말을 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피 흘려 구원하신 성도를 실족케 하거나 상처 입히지 않습니다. 마귀의 말을 하면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 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문을 밟고 드나드는 모든 성도님들마다 남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칭찬하고 세워주는 말만 하시기를 열망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성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칼럼의 내용이 한 분에게도 “Offended” 즉, 기분나쁘게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잘 하고 계십니다. 힘을 내십시오.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