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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로운 성도 은혜로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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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한인교회 작성일24-06-22 07:56 조회1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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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있어서 지혜만큼 소중 한 것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솔로몬 왕이 ‘무엇을

원하는가’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원한다고 대답한 것만큼 지혜로운 명답도

없습니다. 지혜는 ‘똑똑함’과는 다릅니다. 똑똑한데 미련한 사람이 있고 어수룩한 것

같은데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똑똑함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인지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뛰어남” 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지혜로움의 정의는 “사리를 분별하며 적절히

처리하는 능력”입니다. 이 두가지 정의가 같은 말 같기도 하고 다른 말 같기도 한데,

솔로몬 왕이 지혜의 사람으로서 역사 위로 부상한 사건에 등장하는 두 여인을 통해

지혜로움과 똑똑함의 의미를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두 여인이 같은 시기에 각자 아들을 낳아 길렀습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한 방에서

갓난 아이들을 데리고 잠을 자던 이 두 여인이 아침에 일어나 보니 둘 중 한 아이가

죽어있었습니다. 두 어미는 서로 산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을 했고 결국 솔로몬

왕에게까지 이 송사가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은 살아 있는 아이를 반으로

쪼개서 두 어미에게 반반씩 주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 앞에서 한 어미는 공정한 판결이라고 하면서 수락했습니다. 이것은 똑똑함의

표상입니다. 공정하다는 것이고, ‘내가 가지지 못하니 너도 갖지 말라’ ‘둘 다 공평하게

가지지 말자’ 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어미는 자기가 포기할터이니 아이를 살려서 상대방

여인에게 주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혜로움의 표상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식을

되돌려 받게 될 거라고 판단했고 그 판단대로 되었기 때문에 이 두 번째 여인이

지혜로웠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여인을 지혜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 것을 잃어도

생명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똑똑함은 서로를 상하게 할 수 있지만 지혜로움은 항상 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구더기 때문에 장을 담그지 않겠다는 판단은 똑똑한 판단일지 모르나 지혜로운 판단은

아닙니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산간을 태울 사람은 없겠지만, 놀랍게도 빈대 때문에

열받으면 초가삼간이 아니라 구중궁궐까지도 불태울 수 있습니다. 로마 시를 불태운

네로 황제가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똑똑한 미련스러움은 크고 작게

우리들 안에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찬으로서, 그리고 교회로서 어떤 결정을 내릴 때, 그 결정이 나의

체면이나 권리를 세워주느냐에 초점을 맞추는 것 대신에, 사람을 살리고 교회에

유익하고 주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점들은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거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해나 판단이

다분히 주관적이 되고 평소의 나 됨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손히 주님과

동행함이 일상이 되고 철저하게 주님 뜻에 순복함이 거룩한 버릇, 거룩한 습관이 될 때,

우리는 좀 더 자유로움을 경험하게 되고 그것은 우리를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할

것입니다.


어릴 적 즐겨 보았던 만화 영화 “뽀빠이”에서 주인공 뽀빠이가 툭하면 하던 말이

있습니다. “나는 그저 나야. 그리고 이게 나의 전부야.” “I am what I am and that's all

I am.” 결국 이 말은 ‘그러니까 나에게서 너무 기대하지 마’ 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메시지는 크리스찬들에게 상당히

부정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영적 성장을 거부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가 될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툭하면 사용하는 핑계,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약해서”라는 말과 똑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이 가진 더 치명적인 파괴력은 “I am what I am” “나는 그저

나야”라는 말은 정작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만 사용하실 수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외의 모든 존재는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조물주가 지으실 때의

독특한 목적과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지혜로움은 “나는

그저 나야” “나는 원래 그래”라는 틀에서 나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또 다른 나를 향해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과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 가운데

행하기를 갈망하시는 중심 역할로부터 그분을 제외시키지 않는 것이 지혜로움이고,

은혜로운 교회는 그렇게 지혜롭게 사역을 감당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로 날마다 새로워져 가기를 갈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