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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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3-03 13:30 조회2,35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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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지난 세기에 가장 유명한 복음 전도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별세 하셨습니다. 이 분에 대한 평가는 후세 사람들이 하겠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이 분과 함께 동시대를 살았다는 것이 기쁨일만큼 그래함 목사님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온 삶을 바친 분이셨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간 성도들이 천국환영식을 개설했다면 아마도 그 자리는 그래함 목사님이 인도했던 여의도 광장에서의 전도집회에 모인 인파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모인 자리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함 목사님을 설명해주는 별명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의 하나인 “대통령들의 목사”라는 별명은 그가 미국과 세계에 영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33대 해리 트루만을 시작으로 아이젠 하워, 케네디, 존슨, 닉슨,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클린턴, 부시, 그리고 44대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거의 70년에 가깝도록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12명에게 영적인 멘토링을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그의 행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정치 목사’라는 것이 그 이유이고, 권력에 빌붙어 약자들을 돌보지 않는 삯군목자라는 말도 서슴치 않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그가 일생동안 일관되게 보여주었던 삶의 철학과 실천 그리고 열매들을 보면 그는 복음 전도라는 목적을 위해 사람을 가리지 않고 폭넓게 만났으며 그들에게 그들의 관점에서 복음을 전하기를 힘썼던 분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강한 자에게는 강한 자처럼, 약한 자에게는 약한 자처럼 되어 그들에게 다가갔던 사도 바울이 그분의 롤 모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보다 한 세대를 앞서 살았던 전도자 무디 목사님이 자신의 전도 방법을 사사건건 트집을 잡으며 시비를 걸던 사람에게 한번은 이렇게 말했답니다 – “나도 내 방법이 그리 썩 맘에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방법은 무엇인가요?” 그러자 자기는 방법이 없다고 얼버무리는 상대방을 향해 무디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는 내 방법이 훨씬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사회 전반에 권위 체계가 무너지고 또 그 영향이 교회 안에도 들어와 하나님을 경외함과 영적 질서를 거부하는 문화 속에서 교회들마다 진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더 가슴 아픈 현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들마저도 이런 문제에 대안없는 비난과 책임 전가만을 일삼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 탓이오” 하는 사람은 없고, 오로지 “당신 탓이오” 라고 성토하는 사람들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어둠은 빛으로만 물리칠 수 있습니다. 어둠을 어둡다고 비난한다고 그 어둠이 물러가지 않습니다. 그대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변화된 영적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시 37:1, 3) 는 말을 입으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살아냈던 다윗은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시 37:8)고 지적하면서, “여호와를 바라고 그의 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땅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라 악인이 끊어질 때에 네가 똑똑히 보리로다” (시 37:34) 는 대안적 삶의 모습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이것이 빛 되신 그리스도를 죄로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비추어주는 천국 원리입니다. 그리고 이 원리를 준행하는 개인이나 가정이나 일터 혹은 믿음의 공동체 안에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고민하고 합심해서 이루어내야 할 삶의 목적이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빌리 그래함 목사님과 같은 세기적인 복음 전도자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맡겨주신 몫 만큼만 하면 됩니다. 주님께는 ‘양 보다 질’이 더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다섯 달란트나 두 달란트나 심지어는 한 달란트나 주님께는 액수가 중요하지 않고 각자가 맡은 것을 어떻게 관리했느냐가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삶을 추모하면서 저 자신과 여러분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 “그럼,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