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에서 받은 희한한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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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3 20:36 조회2,041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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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부터 2층의 남자 화장실에 가 앉으면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처음엔 무심코 지나쳤는데 가만 보니 그것은 거미였습니다. 변기에 앉아 고개를 바닥쪽으로 향하면 바닥에 거의 닫는 곳에 눈꼽만한 거미가 요동도 하지 않고 며칠을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자세로 미동도 하지 않은채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기왕이면 먹을 것 많은 넓은 세상에 나가 줄을 칠것이지.” 이 미련스런 거미가 안쓰러웠지만 저의 마음을 알 턱이 없는 이 거미는 아직도 그 곳에 그렇게 “죽치고” 앉아 있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날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어떻게 먹고 살런지 괜한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번은 이게 정말 살아있는 거미인가 싶어 화장지를 작게 짤라 위에서부터 거미를 향해 떨어뜨려 보았습니다. 비록 맞진 않았지만 화들짝 놀라 움직이는 걸 통해 살아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거미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떨어뜨린 종이가 거미에게 닿기도 전에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과 그 부딪힘에 조금도 요동이 없던 거미줄의 견고함이었습니다. 그만하면 왠만한 파리 한 마리쯤은 문제없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장소였습니다. 암만 보아도 “헛물”켜는 곳에서 헛수고하며 허송세월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장소와는 달리 바람걱정, 이슬걱정, 등등 걱정할 것이 많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거미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있는 사정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암만 봐도 냄새나고 밥벌이가 안되는 화장실 바닥보단 고생이 돼도 밖에 나가는 것이 한결 나아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내가 거미가 되어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 난감하고 답답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 거미를 보면서 한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장실에서 받은 은혜가 되겠지요. 그건 다름 아니라, 먹이를 잡으려면 역시 먹이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해도, 고생이 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해도 먹이가 있는 곳에 거미줄을 쳐야 된다는 것이지요.
큰 뜻을 세우고 그걸 이루기 원한다면 그 만한 고생은 각오해야 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러한 이치는 신자의 삶이나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교회와 교회의 각 지체인 신자의 존재 목적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사역을 연장시키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는 일이 교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실상은 불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몰트만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먹이”가 있는 곳에 거미줄을 쳐야하듯,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그렇게 구원얻은 우리들끼리 “축복을 나눠먹는”일은 개인이나 교회의 존재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편한 삶의 울타리”를 넘어 불편하고 두렵고 내키지 않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만나야 하고 신의를 바탕으로 한 좋은 관계를 세워야 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그들의 영혼을 감싸 안고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교회를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싫든 좋든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소원이요 뜻입니다. 그렇게 사는 개인이 복있는 사람이요 그렇게 하는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화장실에서 미련한 한 마리의 거미를 통해 받은 희한한 은혜입니다.
한번은 이게 정말 살아있는 거미인가 싶어 화장지를 작게 짤라 위에서부터 거미를 향해 떨어뜨려 보았습니다. 비록 맞진 않았지만 화들짝 놀라 움직이는 걸 통해 살아서 먹이를 기다리고 있는 거미인 것을 확인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떨어뜨린 종이가 거미에게 닿기도 전에 쳐놓은 거미줄에 걸린 것과 그 부딪힘에 조금도 요동이 없던 거미줄의 견고함이었습니다. 그만하면 왠만한 파리 한 마리쯤은 문제없이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장소였습니다. 암만 보아도 “헛물”켜는 곳에서 헛수고하며 허송세월하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지금이라도 밖에 나가면 좋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장소와는 달리 바람걱정, 이슬걱정, 등등 걱정할 것이 많이 생길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굶어 죽는 것보단 훨씬 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거미의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모르고 있는 사정이 있는 진 모르겠지만, 내 생각엔 암만 봐도 냄새나고 밥벌이가 안되는 화장실 바닥보단 고생이 돼도 밖에 나가는 것이 한결 나아보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던 것처럼 내가 거미가 되어 알려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참 난감하고 답답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 거미를 보면서 한가지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화장실에서 받은 은혜가 되겠지요. 그건 다름 아니라, 먹이를 잡으려면 역시 먹이가 있는 곳에 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게 편안한 삶이 아니라 해도, 고생이 되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해도 먹이가 있는 곳에 거미줄을 쳐야 된다는 것이지요.
큰 뜻을 세우고 그걸 이루기 원한다면 그 만한 고생은 각오해야 합니다.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이러한 이치는 신자의 삶이나 교회에도 똑같이 적용이 된다고 봅니다. 교회와 교회의 각 지체인 신자의 존재 목적은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사역을 연장시키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이루신 구원의 완성을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전하는 일이 교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입니다. 그런 면에서 교회는 신자들의 공동체이지만 실상은 불신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희망의 신학을 말했던 몰트만의 말을 빌리자면 교회는 “세상을 위한 교회”가 아니라 “세상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면 우리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먹이”가 있는 곳에 거미줄을 쳐야하듯,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이 있는 곳으로 찾아가야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그렇게 구원얻은 우리들끼리 “축복을 나눠먹는”일은 개인이나 교회의 존재목적에서 크게 벗어난 것입니다. 우리의 “편한 삶의 울타리”를 넘어 불편하고 두렵고 내키지 않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 그들을 만나야 하고 신의를 바탕으로 한 좋은 관계를 세워야 하고 예수의 심장으로 그들의 영혼을 감싸 안고 주님 앞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교회를 세우신 이유인 것입니다. 싫든 좋든 그것은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소원이요 뜻입니다. 그렇게 사는 개인이 복있는 사람이요 그렇게 하는 교회가 “큰 교회”입니다. 화장실에서 미련한 한 마리의 거미를 통해 받은 희한한 은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