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나미는 하나님의 심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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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3 20:58 조회1,84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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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남아시아 쓰나미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헌금을 많은 교우들이 십시일반하여 내 주셨습니다. 한 주 전에 간단히 광고말씀 한번 드렸는데 기억하고 참여해 주셨습니다. 미처 준비하지 못해 참여하지 못한 분들을 위해 오늘까지 기다렸다가 구제팀을 통해 본 교단의 국제선교본부를 통해 전달할 것입니다. 동참해 주신 분들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감리교 교인수를 갖고 있음을 자랑하는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설교중 ‘쓰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하여 교회 안팎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지역들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 창궐한 지역이고 그들이 교회를 핍박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진해일의 피해를 입었으며 태국의 푸켓같은 곳은 향락과 마약과 음란이 성행하는 곳이어서 그 죄의 결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어서는 그럴듯 하지만 이런 논리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즉, ‘지진해일로 고난받지 않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않은 의인’이라는 자만내지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면 말이나 행동에서 고난받는 이웃을 정죄하고 그렇지 않은 자기는 상대적으로 거룩한 존재인 것을 은연중 과시하고 맙니다. 설령 그 정도까지 “막 가지는 않는다”해도 고난이 자신에게 찾아올 때 덮어놓고 ‘하나님이 나를 때린다’고 단정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재앙을 만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 마침 두 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눅13:1-4).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죄를 묵인하거나 그냥 용납하셨다는 말씀이 없을뿐 아니라 재앙을 만난 것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되고 주위에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하라는 메시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를바가 전혀없음에도 나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기가막힌 천재지변의 재앙만이 아니라 병이나 사업이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닥친 교우들을 볼때마다 우리는 그런 겸허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 분들을 향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저 머리숙여 송구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성도들의 옳은 자세입니다. 구제는 이 “송구한 감사”의 한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 단정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나를 정화시키시고 성숙시켜 가시려 한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감리교 교인수를 갖고 있음을 자랑하는 교회의 담임목회자가 설교중 ‘쓰나미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하여 교회 안팎에서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고 합니다. 피해지역들이 대부분 힌두교도들이 창궐한 지역이고 그들이 교회를 핍박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지진해일의 피해를 입었으며 태국의 푸켓같은 곳은 향락과 마약과 음란이 성행하는 곳이어서 그 죄의 결과로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는 것입니다.
얼핏 들어서는 그럴듯 하지만 이런 논리속에는 무서운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즉, ‘지진해일로 고난받지 않는 나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죄짓지 않은 의인’이라는 자만내지는 독선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게 되면 말이나 행동에서 고난받는 이웃을 정죄하고 그렇지 않은 자기는 상대적으로 거룩한 존재인 것을 은연중 과시하고 맙니다. 설령 그 정도까지 “막 가지는 않는다”해도 고난이 자신에게 찾아올 때 덮어놓고 ‘하나님이 나를 때린다’고 단정해버리는 과오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재앙을 만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지는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말씀이 이미 성경에 기록되어있습니다.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때 마침 두 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같이 망하리라”(눅13:1-4).
예수님의 가르침 속에는 죄를 묵인하거나 그냥 용납하셨다는 말씀이 없을뿐 아니라 재앙을 만난 것에 따라 죄의 유무를 판단해서는 안되고 주위에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도록 하라는 메시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나도 그 사람들과 다를바가 전혀없음에도 나에게 재앙이 닥치지 않은 것은 순전히 주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기가막힌 천재지변의 재앙만이 아니라 병이나 사업이나 자녀에게 어려움이 닥친 교우들을 볼때마다 우리는 그런 겸허한 마음으로 대하고 그 분들을 향한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그저 머리숙여 송구한 감사를 드리는 것이 성도들의 옳은 자세입니다. 구제는 이 “송구한 감사”의 한 표현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내게 어려움이 올 때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 단정하는 대신 하나님께서 나를 정화시키시고 성숙시켜 가시려 한다고 여겨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