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이유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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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한인교회 작성일20-04-18 13:32 조회2,18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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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을 3차 세계대전으로 비유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설령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해도 1, 2차 세계 대전과는 사뭇 양상이 다른 것만은 사실입니다. 보이지도 않는 상대가 바로 내 눈과 코와 입으로부터 6피트 앞에서 나를 포위하고 있고 언제 어떻게 나를 무너뜨릴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아니 인류 역사 이래 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처럼 확실하게 영향을 끼친 것도 그리 많지 않은 것을 볼 때,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결국은 이겨낼 것입니다. “If”(만일)가 아니라 “When” (언제)의 문제만 남은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리더들이나 국민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현명하게 대처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로서 저와 여러분이 깊이 생각해보고 실천해야 할 부분은 “How” (어떻게) 입니다. 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성도로서 어떻게 살 것인가가 우리의 지대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어둔 밤에 영롱한 빛을 발하는 별처럼 살 것인지, 아니면 밝은 대낮에 떠 있는 하늘의 별처럼 존재감을 상실한 채 살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전적으로 우리들 각자의 몫이요 책임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상반된 삶의 결과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바로 소망의 여부입니다. 소망의 줄을 굳게 붙잡는 성도는 성도다운 언행심사를 보여주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신자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말 것입니다. 결국 고난이 우리 안에 있는 형이상학적인 믿음의 존재를 현실로 실체화 해 내는 것입니다.
세계2차 대전 이후 수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명과 변화를 주었던 인물 가운데 네덜란드가 낳은 코리 텐 붐이 있습니다. 유대인을 숨겨주다 적발되어 수용소에 갇혀 온갖 절망적인 순간을 경험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수용소 안에서 있었던 수많은 일화들은 코리 텐 붐이 얼마나 소망의 찬란한 빛을 캄캄한 수용소 안에 비추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또한 수용소 밖에서 보여주었던 삶의 발자국들은 그것을 통해 용서와 사랑의 복음이 강력하게 전달되게 했습니다.
그가 남긴 말 중에 “불확실한 미래를 확실한 하나님께 맡기기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나 “기차가 캄캄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기차표를 찢거나 기차에서 뛰어내려선 안 됩니다. 조용히 앉아 기관사를 믿고 기다리면 잠시 후 터널 밖 밝은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는 말은 오늘 이 시대에 어려워 하고 절망 가운데 있는 모든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 각자 삶의 운전대를 붙잡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이 터널을 벗어날 때까지 믿는 자 답게 생각과 말과 행실을 조율할 때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편 23:4)고 노래했던 다윗처럼 선한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는 우리 모두가 되면 좋겠습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에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지옥에는 절망 뿐이라는 의미인데, 결국 지옥은 소망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된다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비단 사후 세계에서만이 아니라 이생에서도 지옥의 실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천국이 죽은 후에만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맛볼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소망의 이유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사는 사람은 이 땅이 천국 지점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지옥 본점을 미리 끌어다가 톡톡히 경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엊그저께 귀넷 시빅센터 앞길을 지나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넓은 주차장 여기저기에 풀이 자라고 있는 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주차장 아스팔트를 뚫고 자라는 풀의 생존력도 놀라웠지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풀이 자라는 냉혹한 현실이 서글플 정도로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예화집에서 읽은 어느 이야기가 묘하게 오버랩되었습니다.
잡초가 무성히 자란 땅이 있었습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 없어 보이는 이 을씨년스런 땅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불평하고 부정적인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지날 때마다 유심히 관찰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고 혼자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그 독백처럼 쏟아내는 그 사람의 말을 마침 그곳에 서있던 그 땅 주인이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충격적인 제안을 했습니다. “나는 이 땅 주인되는 사람이오. 원한다면 이 땅을 당신에게 주겠소.” 그리고는 그 이유를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동안 여기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이 황량하게 버려져 있는 것 같은 땅에 대해서 불평만 일삼았오. 그런데 당신은 그 사람들과는 다르군요. 당신의 말을 들어보니 나는 당신이 이 땅을 비옥한 땅으로 만들거라고 확신합니다.”
잡초에 뒤덮인 땅을 바라보며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정말 굉장한 땅이야!” 버려진 땅이 아니라 놀라운 수확을 거둘 수 있는 비옥한 땅으로 그려보았던 것입니다. 소위 말하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고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을 소망의 눈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이야기도 비슷한 교훈을 가지고 있지요.
주님께서 이 상황 속에서 무엇을 하실지에 대해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과 동역하는 소망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