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와 야고보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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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종호 작성일09-11-03 10:36 조회1,64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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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와 야고보를 찾습니다(인터넷에서 퍼온 글)
요즈음 교육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아인시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중국집 배달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한국의 획일화된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주변 환경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그 재능을 썩히고 만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가 예수님 이후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큰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 그 자신의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그가 사역하던 때의 주변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선교사가 사역을 올바르게 해 나가는데 있어서 파송 교회의 완고한 태도가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울의 경우에도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식의 유대인 중심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파송교회가 자신들의 예배 형식이나 의식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선교지에서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 그가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사도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이면서도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헬라 문화를 잘 알고 또 로마 시민권도 갖고 있던 국제인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사역을 함에있어서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사역을 하던 베드로 등 사도들의 지원은 절대 불가결(不可缺)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경험한 후에도 유대인 중심적인 구약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 사건(행10)을 경험하고서는 폭넓은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사역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행15). 베드로와 야고보등의 사도들은 바울처럼 국제인은 되지 못하였으나 선교의 초문화적 양상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선교사를 발굴하고 파송하며 지원하는 일을 맡은 본국 사역자로서는 이러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선교사가 아무리 올바르게 사역을 하고 싶어도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폭넓은 세계관을 가진 ‘베드로와 야고보’ 즉 올바른 선교마인드를 가진 파송교회 없이는 그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교사들의 발굴, 훈련, 파송, 재교육 못지않게 파송교회의 올바른 선교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훌륭한 ‘바울’도 많이 필요하지만 바른 패러다임을 가진 ‘베드로’와 ‘야고보’가 정말 필요합니다. 바울을 알아주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많아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없이는 바울도 결국 ‘중국집 배달원’ 노릇밖에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에서 퍼온글
요즈음 교육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가운데 “아인시타인이 한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중국집 배달원밖에 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한국의 획일화된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주변 환경과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그 능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그 재능을 썩히고 만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그가 예수님 이후의 첫 번째 선교사로서 큰 업적을 남기게 된 것이 그 자신의 탁월성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하심 가운데 이루어졌지만 그가 사역하던 때의 주변 상황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선교사가 사역을 올바르게 해 나가는데 있어서 파송 교회의 완고한 태도가 큰 장애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바울의 경우에도 먼저 믿은 유대인들이 바울의 이방인 사역의 발목을 잡고 있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약식의 유대인 중심의 패러다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파송교회가 자신들의 예배 형식이나 의식과 같은 비본질적인 것들을 선교지에서 고집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큰 장애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 그가 이러한 장애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베드로나 야고보 같은 사도들이 큰 역할을 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정통파 유대인이면서도 당시의 세계를 지배하던 헬라 문화를 잘 알고 또 로마 시민권도 갖고 있던 국제인이기도 하였으나 그가 문화적 장벽을 뛰어넘는 사역을 함에있어서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사역을 하던 베드로 등 사도들의 지원은 절대 불가결(不可缺)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오순절 사건을 경험한 후에도 유대인 중심적인 구약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이방인 고넬료에게 세례를 베풀게 되는 사건(행10)을 경험하고서는 폭넓은 세계관을 갖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인 사역의 든든한 후견인이 되었습니다(행15). 베드로와 야고보등의 사도들은 바울처럼 국제인은 되지 못하였으나 선교의 초문화적 양상을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것이 가능하였던 것입니다. 선교사를 발굴하고 파송하며 지원하는 일을 맡은 본국 사역자로서는 이러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선교사가 아무리 올바르게 사역을 하고 싶어도 선교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폭넓은 세계관을 가진 ‘베드로와 야고보’ 즉 올바른 선교마인드를 가진 파송교회 없이는 그 일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선교사들의 발굴, 훈련, 파송, 재교육 못지않게 파송교회의 올바른 선교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애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훌륭한 ‘바울’도 많이 필요하지만 바른 패러다임을 가진 ‘베드로’와 ‘야고보’가 정말 필요합니다. 바울을 알아주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많아져야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없이는 바울도 결국 ‘중국집 배달원’ 노릇밖에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인터넷에서 퍼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