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하기 힘든 사랑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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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3 20:51 조회1,70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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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성도 가정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복면강도로 변신한 이 도둑이 칼을 들이대면서 가지고 있는 돈과 귀중품을 남김없이 다 내놓으라고 위협했습니다. 마치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협박하는 그 서슬퍼런 말에 자기도 모른 채 있는 돈과 귀중품을 남김없이 다 내주었습니다. 그 도둑이 도망가고 경찰에 신고한 다음, 이 성도는 안방에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갑자기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서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간증하면서 밝혀진 이 대성통곡의 원인은, 강도 앞에 깡그리 다 내놓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그 때껏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강한 자책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와중에서도 그의 심장을 강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늘 ‘피곤하다, 바쁘다,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등등 핑계하며 온 마음을 주님께 내 놓지 못했던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그 순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 교육관 바깥 쪽의 틈이 생긴 곳으로 벌들이 부지런히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거기다가 집을 짓고 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차라리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것 보다는 서로에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틈이 너무 낮은 곳에 있어 잘못하면 아이들에게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사님 한 분과 함께 그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아무리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분이 안된 후부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서 알고 왔는지 말 그대로 벌떼처럼 벌들이 날라와서는 그 막힌 입구에서 정신없이 멤도는 것이었습니다 (제 눈에는 정신없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막힌 입구를 뚫고 들어가려는 듯이 거기서 서성이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그 벌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안에 갇힌 동료나 가족을 구하려는 의도인지, 집이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 그 집에 쌓아 놓은 식량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갓 미물에 불과한 그 벌들의 그런 모습은 차라리 장렬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저에게 잔잔한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과 그 분의 교회와 그 분의 소원을 위해 얼마나 그렇게 “미친듯이” 살고있느냐는 자책이 가슴 한편에서 밀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마22:37)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대한 사랑을 받지 못할 때의 아픔은 남녀간의 사랑관계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전적인 사랑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 선언문 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때문에 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 간증하면서 밝혀진 이 대성통곡의 원인은, 강도 앞에 깡그리 다 내놓는 자신의 모습 앞에서 그 때껏 하나님 앞에서는 그러지 못했다는 강한 자책감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와중에서도 그의 심장을 강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늘 ‘피곤하다, 바쁘다, 정신적인 여유가 없다,’ 등등 핑계하며 온 마음을 주님께 내 놓지 못했던 자신의 누추한 모습을 그 순간 보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며칠 전 교육관 바깥 쪽의 틈이 생긴 곳으로 벌들이 부지런히 들어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거기다가 집을 짓고 사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차라리 처마 밑에 집을 짓고 사는것 보다는 서로에게 안전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틈이 너무 낮은 곳에 있어 잘못하면 아이들에게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사님 한 분과 함께 그 구멍을 막아버렸습니다. 아무리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몇 분이 안된 후부터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디서 알고 왔는지 말 그대로 벌떼처럼 벌들이 날라와서는 그 막힌 입구에서 정신없이 멤도는 것이었습니다 (제 눈에는 정신없는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그 막힌 입구를 뚫고 들어가려는 듯이 거기서 서성이는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그 벌들은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안에 갇힌 동료나 가족을 구하려는 의도인지, 집이 걱정이 되어서 그랬는지, 그 집에 쌓아 놓은 식량때문인지,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한갓 미물에 불과한 그 벌들의 그런 모습은 차라리 장렬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모습은 저에게 잔잔한 감동과 도전을 주었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과 그 분의 교회와 그 분의 소원을 위해 얼마나 그렇게 “미친듯이” 살고있느냐는 자책이 가슴 한편에서 밀려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마22:37)입니다. 왜냐하면 그 분이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의 사랑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기대한 사랑을 받지 못할 때의 아픔은 남녀간의 사랑관계에서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전적인 사랑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고백 선언문 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분은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