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나미와 카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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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07-01-23 21:08 조회1,75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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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물과 공통적으로 관련되어 있습니다. 피해가 상상을 초월하게 엄청나다는 점도 같습니다. 자연재해이긴 하지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미리 막을 수 있었음에도 방심했다는 점도 洲좡爛求? 인간의 힘이란게 얼마나 보잘것 없는지를 절실하게 깨닫게 해준 사건들이기도 합니다. 피해자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도 같습니다. 복구에 필요한 시간이나 경비가 만만치 않은 것도 비슷합니다. 자연재해 이었음에도 원인을 종교적인데서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도 수나미와 카트리나는 공통적입니다. 특히 이 마지막 점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줄 압니다.
수나미가 동아시아를 할퀴고 지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상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 말의 배경에는 ‘내가 안전한 것은 내가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와 그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총일 분입니다.
카트리나가 한 도시를 덮었을 때 크리스찬이라는 자들 중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성과 마약과 노름으로 타락한 뉴올리언스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다라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기다림에 지치셨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봐야 하실 곳이 뉴올리언스뿐 이겠습니까? ‘저들이 수재를 당한 것을 보니 저들은 악하고 내가 안전한 것을 보니 나는 저들보다 나은게 틀림없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독선과 교만에 가득 찬 발상일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긍휼은 내가 벌 받아야 마땅한 데 벌 받지 않은 것이고 은혜는 내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황송한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 베푸심과 은혜로 우리가 이만 한 것일 뿐입니다. 수재를 당한 이들은 바다수면보다 더 낮은 바닷가에서 안전한 줄로 오해하고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가 허리케인 시즌에 어느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찾아온 그러나 어느 다른 해에 찾아온 것보다 훨씬 큰 카트리나가 찾아왔고 피신하라는 경고를 ‘설마’ 하고 무시하고 따르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된 경고가 주는 더 많은 재해는 우리들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고싸인을 깜빡여주실 때 지체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적절히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어쩌면 카트리나 때보다도 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도적이 들 때 처럼 그렇게 예측불허의 순간에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모습은 먼저 ‘나에게, 나의 가족들에게 구원의 확신신앙이 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일군의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오늘, 여기’에 터를 두고 있지만 ‘내일과 저기’를 내다보는 삶이기도 해야 합니다.
수나미가 동아시아를 할퀴고 지나갔을 때 하나님께서 우상 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심판하신 것이라고 말하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그 말의 배경에는 ‘내가 안전한 것은 내가 그들과 같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는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아닙니다. 우리와 그들은 다르지 않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공로가 아닙니다. 전적인 주님의 은총일 분입니다.
카트리나가 한 도시를 덮었을 때 크리스찬이라는 자들 중 어떤 부류에 속한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성과 마약과 노름으로 타락한 뉴올리언스를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이다라고.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 기다림에 지치셨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봐야 하실 곳이 뉴올리언스뿐 이겠습니까? ‘저들이 수재를 당한 것을 보니 저들은 악하고 내가 안전한 것을 보니 나는 저들보다 나은게 틀림없다’는 논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독선과 교만에 가득 찬 발상일뿐입니다.
우리가 우리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긍휼과 은혜입니다. 긍휼은 내가 벌 받아야 마땅한 데 벌 받지 않은 것이고 은혜는 내가 받을 수 없는 것을 받은 황송한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이 긍휼 베푸심과 은혜로 우리가 이만 한 것일 뿐입니다. 수재를 당한 이들은 바다수면보다 더 낮은 바닷가에서 안전한 줄로 오해하고 무방비 상태로 지내다가 허리케인 시즌에 어느 다른 해와 마찬가지로 찾아온 그러나 어느 다른 해에 찾아온 것보다 훨씬 큰 카트리나가 찾아왔고 피신하라는 경고를 ‘설마’ 하고 무시하고 따르지 않은 결과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무시된 경고가 주는 더 많은 재해는 우리들의 영적 삶에도 그대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고싸인을 깜빡여주실 때 지체없이 행동으로 옮기고 적절히 대처해야 합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는 어쩌면 카트리나 때보다도 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입니다. 도적이 들 때 처럼 그렇게 예측불허의 순간에 오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재림을 대비하는 모습은 먼저 ‘나에게, 나의 가족들에게 구원의 확신신앙이 있는가?’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착하고 충성된 일군의 모습으로 하루 하루를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오늘, 여기’에 터를 두고 있지만 ‘내일과 저기’를 내다보는 삶이기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