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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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슈가로프 작성일10-11-08 10:23 조회1,70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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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성품, 거룩함]이라는 책에서 낸시 레이 드모스는 이런 말을 합니다.
야영을 좋아하던 ‘곰 전문가’ 티모시 트레드웰은 10년 넘게 여름이 되면 비무장 상태로 알래스카 회색 곰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며 촬영을 했다. 그는 곰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가 이름을 지어 주고 때로 바로 옆까지 접근해 그들을 만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해 곰은 대체로 무해하고 사교적인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년 후인 2003년 10월 6일, 곰의 공격을 받고 죽은 트레드웰과 그의 여자 친구의 시신이 알래스카 반도의 카트마이 국립공원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주는 교훈은 너무나 분명하다. 야생동물은 ‘교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고 믿음을 갖게 한다고 해도, 그들은 조만간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마련이다. 이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 폭탄을 갖고 장난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은 건강한 두려움과 조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생동물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죄에 가까이 가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죄는 ‘무해하다’라는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동안 죄와 함께 놀았지만 한 번도 심하게 물린 적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한국과 이곳 애틀란타의 대교회의 두 목회자들이 성희롱 이슈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회자들의 이런 모습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세태가 되고 말았지만 특히 삼일교회의 경우 한국사회나 기독교계에 주는 충격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떠나는 때에 청년 수만명으로만 이루어진 그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청년 사역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크리스찬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넘어질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방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방심하기도 하고 유혹의 세력에 대해서도 방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낸시 레이 드모스가 지적한 것처럼 “무해하다”는 무의식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원통하고 가증스런 일들을 두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두둔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 6:1-3)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면서 언제나 영적 경계의 태세를 단단히 하고 나아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기 원할뿐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겁없이” 여러분 곁에 가까이 두고 있는 또 다른 “곰”은 없습니까? 늦기 전에 버리십시오. 떠나십시오.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다른 여러 사람이 삽니다.
야영을 좋아하던 ‘곰 전문가’ 티모시 트레드웰은 10년 넘게 여름이 되면 비무장 상태로 알래스카 회색 곰들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평화롭게 지내며 촬영을 했다. 그는 곰들에게 자신 있게 다가가 이름을 지어 주고 때로 바로 옆까지 접근해 그들을 만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데이비드 레터맨 쇼’에 출연해 곰은 대체로 무해하고 사교적인 동물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2년 후인 2003년 10월 6일, 곰의 공격을 받고 죽은 트레드웰과 그의 여자 친구의 시신이 알래스카 반도의 카트마이 국립공원에서 발견되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이 주는 교훈은 너무나 분명하다. 야생동물은 ‘교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야생동물이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 편안함을 주고 믿음을 갖게 한다고 해도, 그들은 조만간 본성에 따라 행동하게 마련이다. 이 교훈을 무시하는 것은 폭탄을 갖고 장난치는 것과 같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야생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는 것은 건강한 두려움과 조심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생동물보다 훨씬 더 치명적인 죄에 가까이 가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죄는 ‘무해하다’라는 무의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몇 년 동안 죄와 함께 놀았지만 한 번도 심하게 물린 적이 없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요즘 한국과 이곳 애틀란타의 대교회의 두 목회자들이 성희롱 이슈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제는 목회자들의 이런 모습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세태가 되고 말았지만 특히 삼일교회의 경우 한국사회나 기독교계에 주는 충격은 그 어느 때보다 큰 것 같습니다. 교회에서 청년들이 떠나는 때에 청년 수만명으로만 이루어진 그 교회와 그 교회의 담임목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청년 사역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다고까지 표현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크리스찬들이 이런 점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넘어질까요? 그 이유는 한마디로 방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방심하기도 하고 유혹의 세력에 대해서도 방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낸시 레이 드모스가 지적한 것처럼 “무해하다”는 무의식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원통하고 가증스런 일들을 두고 누구를 비난하거나 두둔하려는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갈 6:1-3)의 말씀처럼 나 자신을 철저하게 성찰하면서 언제나 영적 경계의 태세를 단단히 하고 나아가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워주는 온유한 사람이 되기를 힘쓰기 원할뿐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겁없이” 여러분 곁에 가까이 두고 있는 또 다른 “곰”은 없습니까? 늦기 전에 버리십시오. 떠나십시오. 그 자리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그래야 여러분도 살고 가정도 살고 교회도 살고 다른 여러 사람이 삽니다.